한승조

안암산우회와 나 그리고 고려대학교

안암산우회와 나 그리고 고려대학교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

 

 

高大 安岩山友會 50주년 기념행사로 고려대학교와 나, 한승조와의 인연을 회고하는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라는 노랫말이 연상될 정도로 나와 고려대학교와의 인연은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 한 평생의 활동기간 중 50년 이상을 고려대의 울타리에서 학생으로서, 강사로서, 교수 및 명예교수로서 지내왔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고려대 명예교수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며 살 것이니 만큼 내가 고대인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 70년을 高大와의 인연으로 지내왔다. 그 이전 어린 시절 16년을 고려대 입학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다고 본다면 나로부터 고려대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내 자신을 고려대와 튼튼하게 묶어주는데 기여한 것이 안암산우회였다고 말하고 싶다.

 

고려대와 나와의 인연

나는 1930113일 생이다. 고려대 예과에는 19461년생으로 입학하였다. 1946년에 내 나이 17세로 그때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학으로 승격 발족하였을 때에 고대 학생이 된 것이다. 학생에서 교수로 지냈기 때문에 평행 고대라는 이름을 나로부터 뺀다면 남는 것이 없어지는 격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우리 집안, 국가 그리고 모교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느냐는 것인데 이것은 남들이 평가해줄 일이지 내가 자의로 무어라고 평가할 문제가 아닐 것 같다. 나와 고려대학교와 이러한 엄청난 인연이 이렇게 끈질긴데 비해서는 내가 고려대에 입학하게 된 動機는 매우 우발적이며 단순한 것이었다. 하기는 인연이라는 것이 모두 그런 것이므로 이상하다고 생각할 일이 아닐 것이나.

194510월 어느 날엔가 중학생이었을 때 재학 중이던 학교 축구시합을 응원하기 위해 고려대 교정을 찾아왔다. 그때 맑고 높은 가을하늘 아래 우뚝 솟아 보이던 멋있고 아름다운 도서관 건물의 석탑이 나를 매료시켰다. ‘이런 건물에서 평생 책을 보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인연이 되어서 나는 1946년 봄에 고려대에 입학시험을 치루게 되었던 것이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는 상급학교에 원서를 내야 했다. 장래 내가 무엇을 하고 평생을 살아나갈까 생각하다가 한국에 그저 많은 것이 인데 산과 들로 돌아다녀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1차로 지원하려던 학교는 수원농대의 임학과였다.

그런데 수원농대의 입학시험에 앞서서 특차입학시험을 치루는 학교 중에 고려대가 있었다. 대학의 입학시험을 미리 한번 연습 삼아서 고려대에 입학원서를 냈다. 1946년 학년도의 고려대 政法大의 입시경쟁은 111이고 經商大131정도로 지원자가 많았다.

당시 고려대에 그렇게 많은 지원자가 몰려들게 된 이유는 815해방 직후에 일본 학교에 입학하려고 浪人생활을 하던 대학입시생들이 일본으로 갈 길이 막혀버린 탓으로 그들 중 대부분이 고려대학교에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일제시대부터 4년제 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 있었고, 또 그때 가장 좋다는 경성제국대학과 그 예과가 일본의 패망으로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좋은 학교는 갓 출범하는 高麗大뿐이라 소문이 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내가 시험을 본 과목은 국어 수학 영어 및 英文法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요행스럽게도 전무후무하게 어려웠던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고려대 정법대학 豫科入學할 수가 있었다. 합격발표 후에도 나는 수원농대를 지원하려고 서울역으로 가 보았지만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서울역에 모여 있어서 발을 디딜 틈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루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복잡한 서울역에 와서 매일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닐 수가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水原農大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때 약수동에 살고 있었다. 거기서는 고대로 가는 차편도 없었다. 장충동까지 걸어서 전차로 동대문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전차를 갈아타서 성동역에 내려서 안암동 쪽으로 걸어야 했다. 이런 전차 通學의 번거로움을 피하려면 신당동시장까지 걸어내려와서 형제주점 부근까지 논두렁을 걸어 안암동 길로 올라와서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피어나는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학교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 본관 일층 교실에 들어와서 수업을 기다렸는데 늘 좌우익 사상싸움과 계속되는 同盟休學으로 학교생활은 영 엉망이었다. 그나마 고려대의 운동경기 구경과 응원이 낙이었다. 당시 高大는 국내 최고의 축구팀과 농구 그리고 아이스하키 팀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경기는 매우 멋있고 또 볼만하였다.

19506625전쟁이 났을 때 나는 많은 학우들과 함께 의용군에 끌려 나갔다가 2주일간 동성상고에서 훈련받았다. 中部戰線에 끌려 나가서 戰鬪에 투입되어 부상으로 후송 당하던 중 요행히 빠져나와서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이것은 조상의 음덕과 부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가능하였던 일이었다.

53년에 母校로 복귀하여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는 대학강사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渡美留學의 기회를 얻어서 박사학위공부를 마친 다음 67년에 고려대 부교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고대에 돌아왔던 1967년 여름 고려대 안암산우회가 발족하였다.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안암산우회에 합류한 것은 1968년 가을인가 69년 봄부터였을 것이다.

 

안암산우회 山行의 추억들

그 후부터 2016년 봄까지 나의 산행회수는 450회를 넘은 상태이다. 그동안 나는 安岩山友會 열성회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450회의 산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산행으로 몇 가지만 골라서 말하고자 한다. 먼저 기억하게 되는 山行은 가장 극심하게 신체적인 苦痛을 겪었던 山行들이었다.

1970년대 40대 초반에 한번은 지리산 산기슭아래에서 장대비를 맞으며 거의 남원까지 걸어서 온 적이 있었다. 지리산으로 오르는데 비가 너무 와서 넘치는 계곡물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오는데 차편도 없어서 남원까지 한 5-60리길을 비를 맞으며 걸었던 적이 있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다니던 버스도 오지 않는 그 먼길을 도보로 걸어서 오는 동안 옷과 배낭은 완전히 비로 젖어버린 채 그저 앞만 보고 걷고 또 걸었다. 그 보행은 신체적인 한계를 완전히 넘은 상태였음에도 어떻게 그 먼길을 걸어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 멀고 고단했던 산행길이었다.

또 한 번은 고참회원들을 따라서 5-6일간의 식량과 침구 그리고 취사도구를 배낭에 잔뜩 담아 메고 노고단에서 천황봉까지 45일 동안 종주한 일이 있었다. 이 때도 너무나 힘들고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힘든 山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5일 만에 지리산의 최정상인 천황봉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 올라서니 안개가 끼어서 그 아래 경치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애써서 5일 산행 끝에 올라왔는데 안개 때문에 주변경치를 전혀 볼 수가 없다니 너무나 기가 차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힘들여서 올라왔는데 구름 안개가 짙게 껴서 주변 풍광을 주여 주지 않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山神이어! 주변 경치 좀 봅시다. 구름과 안개 좀 거두어주세요. 이렇게 크게 소리를 길렀더니 아마도 山神께서 들으신 모양이었다. 곧 바람이 불더니 안개가 깨끗하게 잠시 없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여기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더니 주변이 환하게 잘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물론 높은 산에는 늘 강한 바람이 불고 있어서 구름도 계속 움직인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연의 일치였던가? 구름이 잠시 모두 걷히더니 주변이 환히 모두 선명하게 보이는 드러나 신기했다. 그때까지 나는 山神이 인간 상상일 뿐 실체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야! 山神이 실제로 계시는가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두산 등반기

안암산우회가 백두산 登程을 처음 시도했던 것은 1993년이 아니었던가 기억된다. 그때는 중국과의 국교가 시작된 초기였기 때문에 두 정부간의 합의가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산우회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靑道로 가서 거기서 北京을 구경한 후에 延吉을 들러서 白頭山으로 간다는 여행계획을 세웠지만 정부의 허가를 받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정부요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계획을 어렵게 허락받았다.

안암산우회는 정해진 날에 인천항 부둣가에 모여서 배를 탔다. 칭따오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북경으로 들어갔다. 어느 호텔에서 일박한 다음날 만리장성을 구경하였다. 그 후 비행기로 延吉로 가서 거기서 일박한 다음 백두산으로 가는 버스로 올라탔다.

연길 주변의 농촌 풍경은 바로 한국의 農村을 방불케 하여 깊은 情感이 들었다. 높은 나무들이 있는 멋있는 숲을 지나 꿈에 그리던 白頭山 정상에 올랐다. 미니버스에서 내려서 山頂으로 뛰어가려는데 너무 힘들고 숨이 찼다. 해발 2,700 미터의 높이였으므로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파란 天池가 내려 보였다. 건너편 산봉들 동쪽에 있는 것이 북한땅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서 내려와서 작은 숲에서 산제를 지내려고 하는데 따라온 중국 公安들이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山神祭가 무엇인지 모르는 공산당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무식한 인간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술을 한 잔하였는데 高山에서의 술은 유해물질이었던 모양이었는지 나는 제대로 걷기가 힘들어서 백두산 폭포길을 지나가는 天池行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니 그것이 너무 억울하고 분하였다.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오려는데 하늘에서는 여름철인데 큰 우박 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延吉에서 다시 비행기로 북경을 거쳐서 서울로 돌아 왔다.

1995년인가 나는 다시 백두산을 찾았다. 天池구경을 못하여 사무친 아쉬움 때문이었다. 이때는 丹東으로 직접 가서 압록강에서 北韓을 관찰하며 거기서 기차를 타고 압록강 기슭을 따라 올라가다 도문에서 북한 시장 구경을 한 다음 그 길로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새 항로를 택하였다. 白頭山을 중국에서는 長白山이라고 하며 自國의 영토이며 名所로 알려져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는 말을 들었다. 말인즉 김일성이 백두산을 중국으로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과는 다른 루트로 白頭山으로 올라가서 끝내 天地를 찾아갔으며 天池물에 손발을 넣으며 담그며 충분히 구경할 수가 있었다. 平生의 소원풀이를 한 셈이다. 안암산우회 혜택을 톡톡히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의 이야기

산행과 관련해서 잊을 수 없는 餘談 중 두 가지만 골라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어느 해 여름인가 우리가 속리산을 오르는데 朴希聖 교수님의 미국인 사위가 따라 왔다. Frank Raymond 라는 미국 미시간대학의 수학교수였다. 그가 산으로 오르다가 무릎에 고장이 생긴 것이다. 박희성 교수는 내가 운동을 하였던 사람이라 도움이 될 것 같았는지 불러서 말씀하시길래 알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라고 말하고는 나는 내 몸집의 한 배반 쯤 큰 체구를 가진 사람을 부축이며 산행을 했다. 그리고 휴식 때마다 그의 무릎을 만져주었다.

그렇게 내려오던 중 그 미국인 교수는 갑자기 무릎이 아프지 않다며 고쳐졌다고 말하면서 다리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그 영문을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부상당한 무릎을 만졌을 때 효과가 없어서 다른 쪽 무릎을 만져주었던 것이 주효하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박희성 교수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교수님은 그 말을 듣고는 매우 안심하며 좋아하시는 눈치였다. 그 날 박 교수님으로부터 저녁식사 대접을 잘 받았다.

安岩山友會 관련 한 가지 추억을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하고 끝내야겠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美國大使館 文政官室로 인사간 일이 있었다. 내가 문정관실에서 선발되어 미국 장학금으로 유학을 갔다 온 것이기 때문에 귀국인사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귀국인사를 듣고는 문정관 슈마하 씨가 자신도 미국 버클리대 출신이라고 말하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의 선배다. 내가 외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역사유적방문 모임 회장이다.’ 라면서 나더러 그 모임의 총무로서 심부름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대학선배의 지시라 거절할 수 없어서 그 모임 총무역할을 맡았는데 나는 외국인들이 국사지식이나 문화재에 대하여 넓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한편 나의 무식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 온 부부를 알게 되었다. 나는 공연히 그들에게 큰 소리쳤다. 당신들 이렇게 서울에 와서 좋은 것만 보고 다니면 한국은 끝내 알지 못하고 돌아간다. 한국에 왔으면 시골도 가보고 지방 사람들 생활도 알아야 한다고 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암산우회 산행으로 초대하였다.

그때 갔던 곳이 안양의 군자산이었는데 우리가 山頂에 오를 무렵부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우비도 없고 우산도 없이 계속 비를 맞으며 산행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下山하여 해산할 무렵에 내가 말했다. ‘오늘 비 맞으며 고생이 많았는데 이런 고생은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山行은 당신네들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했더니 그 독일 내외도 환하게 웃으면서 그럴 것 같다는 대답을 하였다. 그렇게 비 맞으며 하루 종일 고생했으면서도 불평도 없이 말없이 따라다니던 그들의 참을성과 교양은 내 마음속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인들의 교양과 문명을 정말 알아주어야 한다. 그들이 오늘날 높은 문명을 누리는 원인도 모두 이런 교양과 참을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결론

안암산우회는 나의 고려대 생활의 재미있는 여담이며 맛있는 양념이며 유익한 활력소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자 이 글을 썼음을 알려드린다. (고려대학교 안암산우회 편, <安岩>15(2017):창립 제50주년 기념특집, 2017.6.15. 242,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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